1.
“피곤해.”
커튼 틈새로 보이는 바깥의 풍경은 이미 새카만 밤이었다. 화이트클라프는 인공적인 조명에 혹사당한 눈을 비비며 테라스 가까이에 마련된 휴게실을 찾았다. 교묘하게 벽 뒤에 숨어있어 무대의 가운데에서만 놀길 좋아하는 이라면 발견조차 하지 못 할 위치였다. 그를 제외하면 주변은 온통 비어있어서 듣는 귀를 걱정할 필요도 없이 혼잣말을 할 수 있었다. 사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느슨하게 행동할 자리는 아니지만 누가 듣는다고 오해를 살 것도 없는 말이었으므로 한 번 더 중얼거렸다.
“피곤해 죽겠군.”
서커스 단장이던 아버지를 따라 여러 지역을 쏘다니던 시절부터 그는 사람이 모인 장소를 사랑했다. 파티장에선 항상 어깨가 뻐근하리만치 등을 꼿꼿이 세웠고 따갑다 못해 피부를 지지는 것 같은 주변의 시선을 즐겼다. 예전에는 이런 자리를 곧잘 재밌어했다. 충동적으로 파티장에서 만난 이들과 이른아침까지 함께하며 인맥과 친분을 쌓았다. 그러나 나이를 먹은 탓인지 직업적 특성상 남들 앞에 나설 일이 많았기 때문인지 요즘에는 조금 더 조용한 분위기를 선호하게 됐다. 조명이 없는 구석 빈자리에 앉아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댄 화이트클라프가 들릴 듯 말듯 작은 한숨을 내쉬곤 눈을 감았다. 마주치는 이들에게 살갑게 웃으며 악수를 청하고 손등에 입맞춤을 하고 있길 몇 시간이 지나자 진이 빠졌다. 앉을 자리가 간절해졌을 땐 이젠 늙었나 싶어 자조했다.
“입술이 다 닳겠습니다.”
고요는 오래가지 못했다. 불청객의 등장이었다. 편한 자세로 짧은 휴식을 만끽하던 화이트클라프는 은밀하다 못해 머릿속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귓속말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목소리가 뒷목을 타고 귓속에 기어들어 온 것 같았다. 감고 있던 눈을 본능적으로 번쩍 뜨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소리를 내어 말한 보람이 있었다. 화이트클라프는 퍽 무심해보이는 표정에 비해 다정한 손길로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루드빅을 보며 부러 새치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있었어?”
어느새 다가온 루드빅이 고개를 완전히 쳐들지 않으면 얼굴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바싹 붙어 섰다. 파티와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였다. 화이트클라프는 루드빅의 벌어진 코트 앞섶을 손으로 여미어 잡았다.
“간다고 한 기억은 없습니다.”
“간줄 알았지. 하도 안보여서.”
화이트클라프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실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가지 않았을 줄 알았다. 가라고 하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루드빅은 손을 타지 않는 고양이 같다가도 충직한 개처럼 우직했으니까.
“언제는 그림자처럼 있으라고 하더니.”
“내 눈에 띄는 곳에 얌전히 있으란 거였지.”
루드빅은 요즘 화이트클라프가 가장 예뻐하는 장난감이었다. 필요한 건 다 해주고, 바라는 것 중 시간과 힘이 드는 일은 별로 없는데다가 잘생기고 섹시하고 힘도 세고. 게다가 오늘 같은 날 경호원을 자처할 만큼 자신을 사랑한다. 화이트클라프는 상냥한 성정이었으나 루드빅에겐 종종 모질게 굴고 싶었다. 마치 오늘처럼. 입장 이후로는 파티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 가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작게 흘리자 루드빅이 가늘게 뜬 눈으로 화이트클라프를 살폈다. 화이트클라프는 앞섶을 잡고 있던 손을 들어 제 입술을 슥슥 만져 보았다.
“내 입술 닳았나?”
“모르겠는데요.”
닳기는....
“근데 왜 쉬다 말고 튀어 나왔어? 끝까지 있는 듯 없는 듯 굴지.”
“그러기 싫어서요. 당신이 너무 나대서 쉴 수도 없었습니다.”
나대는게 아니라 인기가 많은 거지. 눈썹을 삐죽 들어 올린 화이트클라프가 루드빅의 말을 점잖게 반박했다. 거짓은 아니었다. 중국 자본가가 주최한 성대한 파티에서 화이트클라프는 주인공이었다. 연회장의 사람들이 모두 젊고 멋진 정치인에게 열광했다. 파티에 초대받은 수많은 유명인사들 중에서도 그의 존재감은 커다랬다. 곡이 바뀔 때마다 그때그때 눈이 마주친 무리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수줍게 내미는 손에 키스 하고. 그 장면을 묵묵히 지켜봤을 루드빅이 불만스러운 티를 내는 것은 귀여웠다. 얼마나 혀를 찼을까. 그 생각만으로 피로가 좀 가시는 기분이었다.
“입술 좀 쓴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당신은 좀 많이 썼잖아요.”
“난 지금 기분 같아선 아무나 붙잡고 빈 방으로 들어가도 좋을 것 같은데.”
멀리 보이는 남자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그러자 루드빅의 표정이 슬며시 굳어졌다. 아무렇게나 찍은 것 같지만 말 그대로 아무는 아니었다. 화이트클라프는 계획된 행동을 우발적으로 보이게끔 만드는 것에 능했다. 루드빅이 사라진 화이트클라프를 찾기 위해 발소리를 죽이고 돌아다닌 만큼 다른 목적을 가진 이들도 비슷하게 그를 찾아 나섰다. 남자도 그들 중 하나였다. 루드빅의 뒤에 숨겨져있던 화이트클라프가 빼꼼 고개를 내밀자 남자가 화이트클라프를 발견하곤 손짓을 보냈다. 화이트클라프도 같은 손짓으로 남자를 불렀다. 의미는 알 수 없었으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이쉰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이쪽은 제 경호원.”
손님용 소파에 앉아있던 화이트클라프가 기어코 제 앞까지 다가온 남자를 반갑게 맞이하며 손을 내밀었다. 놀랍게도 루드빅은 화이트클라프의 소개 없이도 남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쉰이라 불린 남자는 이 파티의 주최자로 중국의 자본시장에서 제법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제법 큰 양장점의 후계자이었으며, 요일마다 정해진 넥타이를 매고, 성격이 나쁘고, 남색이고, 몇 차례 성추행 혐의가 있었으나 전부 흐지부지 넘어갔다던가. 따로 캐낸 것이 아니라 단지 한 자리에 오래 앉아있자 들려온 소문이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주워들은 스캔들이 꽤 많았다. 거기에는 비단 이쉰뿐 아니라 별로 반갑지 않은 이름도 있었다. 화이트클라프가 일어서자 시선의 높낮이가 줄었다. 반갑게 악수를 한 두 사람이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는 동안 루드빅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태어나길 선한 사람은 인기에 비해 잡음이 좀 덜할 수도 있겠지만, 화이트클라프는 그것에 해당되지 않았다. 만인의 관심을 끄는 만큼 나도는 이야기도 많았다. 얌전한 얼굴로 사람도 죽이고, 돈도 찔러 넣고, 천한 출신에 잠자리 또한 유명하다 했던가. 루드빅은 여러 입으로 주워들은 화이트클라프에 대한 자극적인 이야기를 떠올렸다.
“의원님은 이제 그런 건 안하시죠? 따로 자리를 만들어놨는데.”
“어, 그럴 리가.”
화이트클라프가 무슨 짓을 하고 살아왔는지,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가 정의를 쫓는 타입이었다면 자신과 만나지도 못했으리라는 걸 안다. 루드빅은 화이트클라프가 벌이는 행각에 대해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사람을 묻던, 자원봉사를 하던. 하지만 노골적으로 저를 보며 난잡한 관계를 허락하는 것은 열이 받았다.
“이층으로 올라가면, 문패가 없는 방이 두 개 있어요. 그중에서...”
말을 끝내지 못하고 흐린 남자가 루드빅의 눈치를 보았다. 루드빅이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떠올린 모양이었다. 독일 출신의 청부업자. 아, 경호라는 말 믿는 줄 알았는데. 화이트클라프는 경호원 치고는 많이도 풀어헤친 루드빅의 셔츠를 보며 슬며시 웃었다. 남자는 쉽게 루드빅에 대한 의심을 말로 꺼내지 못했다. 당연했다. 그랬다간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 했을테니까.
“알아서 찾아 갈게요. 같이.”
남자가 묻기도 전에 입을 연 화이트클라프가 루드빅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안갑니다.”
“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가기로 했잖아요?”
“안갑니다.”
“그럼 나 혼자.”
화이트클라프는 루드빅의 냉담한 반응에도 굴하지 않았다. 바짝 쫄아 붙은것은 남자 뿐이었다. 화이트클라프가 어깨 위의 손을 가볍게 내리고 남자에게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루드빅은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초리를 견디지 못한 남자가 조금 있다가 보자는 약속을 남긴 채로 화이트클라프를 가볍게 포옹하곤 물러났다. 루드빅은 연회장의 중심으로 사라진 남자를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코너를 돌아 사라지기 전 남자는 무전으로 누군가와 소통을 했다. 루드빅은 지겹던 중에 잘 되었다는 둥 작게 중얼대며 휴게실에서 빠져나가는 화이트클라프를 쫓았다. 연회장의 문을 열고 나가자 파티와는 완전하게 격리된 홀이 있었다. 화이트클라프는 성큼성큼 계단을 오른 뒤 인적이 드문 이층 복도를 찬찬히 걸으며 문패가 없는 방을 찾아 헤매었다.
“가려고요?”
“걱정할 것 없어. 그 애는 날 좋아하거든, 어릴 때 만나서....”
“아 됐습니다.”
루드빅은 이야기가 길어지기 전에 먼저 화이트클라프의 말을 끊었다. 누가 그런 걸 물었나. 이렇게 큰 파티에서 은밀하게 내통을 하려는 주제에 말을 돌리기는. 물끄러미 루드빅을 바라보던 화이트클라프가 이내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가 그림자처럼 얌전히 있으라고 했지?”
“들어야 됩니까?”
“신경 끄라는 소리야.”
화이트클라프는 복도의 끝에 있는 방문에 손을 댔다. 문을 열자,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났다. 화이트클라프는 루드빅을 마주본 채 열린 문틈으로 뒷걸음질로 걸어 들어갔다. 손님을 모시기 위한 방이라고 만들어진 공간에는 이쉰이 미리 초대해놓은 이들이 득실거렸다. 루드빅은 현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최소한의 조명이 배치된 공간에서 누군가 건네는 물건을 사납게 쳐냈다.
“그냥 다 죽일까요.”
“그럼 내가 화낼걸.”
“적어도 다음부턴 이런 자린 알아서 피하게 될 테니까.”
화이트클라프는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가 일리 있는 말이라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테이블 위에 흩어진 가루를 손가락으로 쓸어 혀에 대는 꼴이 같잖았다. 희미한 조명 아래에 음영이 진 얼굴이 유달리 창백했다. 마치 이런 장소에서 무슨 표정을 지어야 잘 팔리고 잘 먹히는지 아는 상품 같았다.
“이런 것도 다 비즈니스야.”
“난 당신이 제정신으로 걸어 나오길 바라요.”
“내가 이런 곳에서 노는 거 싫어?”
“네.”
“왜?"
“질투나니까요.”
“난 네가 이럴 때마다 너무 황홀하더라.”
짧은 순간, 화이트클라프의 눈이 반짝였다. 과연 살인마의 척애를 시험하길 좋아하는 위인다웠다. 싫은 정도가 아니라 만일 이곳에 남겠다고 계속 고집을 부렸다면 면식도 없는 인간들을 한무더기로 죽일 셈이었다. 루드빅에겐 그럴 힘도 있고, 방법도 알았다.
2.
루드빅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화이트클라프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대로 파티장에 돌아갈 줄 알았는데, 행선지는 한층 더 올라가야 나오는 숙박시설이었다. 문앞에서 오도카니 서있는 루드빅을 잡아 끌어 방 안으로 들인 화이트클라프가 한겹한겹 걸치고 있던 코트와 베스트를 벗어냈다.
“대신 오늘은 여기서 노는 거야. 딱히 호텔 예약 안했거든.”
“그럼 집에 가서 자든지요.”
“난 오늘 집에 들어가기 싫어. 방해 받는건 딱 질색인데 네가 날 짜증나게 했잖아. 그니까 여기서 내 마음을 풀어줘야해. 알겠어?”
“...아아. 네 알아들었습니다.”
와인을 세팅하고 안주가 거리들을 접시에 담아내는 동안 루드빅은 커다란 스위트 룸을 감상했다. 침대는 세 개, 욕실은 두 개. 주방에는 화이트클라프가 있고, 다른 방은 전부 비어 있었다. 혹여나 변변찮은 청부업자들이 개수작을 벌이고 가진 않았을까 집안 곳곳을 살펴보던 루드빅이 빌데, 다정한 목소리로 부르는 부름에 얌전히 그의 앞에 다가섰다. 처음 루드빅의 머리에는 대충 비위를 맞춰주며 술을 마시고 취하게 만든 뒤 그대로 집까지 데리고 오는 신사적인 계획이 있었다.
“이 침대에서 처음 했어.”
“예?”
“이십대 초반에, 뭔지 몰랐거든 그냥 잘생겼으니 술 주겠다길래 따라왔는데 사람 눈을 가려놓고 입에 뭘 물리더니 맞추면 보내준다고 하더라고. 팔뚝은 자꾸 선뜩해지지... 근데 나쁘진 않았어. 오히려 재밌었지.”
침대보를 만지는 손길이 잔잔했다. 마치 가족끼리 처음 소풍을 나갔던 날을 회상하는 것 마냥,